시대의 이미지로 읽는 20세기 현대미술 다다이즘 1편
- artep official
- 12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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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연정
예술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반영한다. 다다이즘의 형성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찬란한 빛의 시대였던 벨 에포크에, 검은 중절모와 프록코트를 입은 부르주아지들이 술잔을 들고 하층민의 ‘노력 부족’을 논하며 서로의 지적 능력을 찬양하던 순간, 바로 그 앞 파리의 검은 골목길에서는 하층민들이 구걸하거나, 이가 들어가지도 않는 딱딱한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던 대중, 그리고 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이 모순에 역설을 느꼈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유산 계급의 합리주의와 시장 중심주의,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이성’에 회의와 염증을 느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이 환멸은 폭발했고,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모인 예술가들은 기존 예술 전체에 대한 근본적 부정, 즉 ‘반-예술(Anti-Kunst)’이라는 태도로 응답했다. 반-예술은 예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이, 아카데미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관습화된 상류층의 미적 체계가 만들어낸 ‘망막의 즐거움’을 위한 예술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다다이즘은 이 저항을 언어, 이미지, 신체, 관습 전반에 걸쳐 수행했다. 사전의 아무 페이지에나 찔러 넣은 페이퍼 나이프가 가리킨 끝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고, 루이스 아라공의 ‘무’의 이론은 기존 체계가 지녔던 의미를 모두 공(空)으로 되돌리는 하나의 조롱이었다.
“화가도 없고, 문학가도 없고, 음악가도 없고, 조각가나 평화주의자, 왕당파, 제국주의자, 무정부주의자도 없고, 사회주의자도 없고, 볼셰비키나 정치가도 없고, 프롤레타리아나 민주주의자도없고, 시인도귀족도 군대도 경찰이나 정당도 없다. 이제 모든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참을 수 없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Louis Aragon, Manifeste d’Aragon, in Maurice Nadeau, Histoire du surréalisme, Paris, Editions du seuil,1970, p. 26.

Figure 1 카바레 볼테르에서 공연 중인 위고 발, 1916. 이미지 출처: https://barriochino.files.wordpress.com/2008/04/hugoball_barriochino.jpg
위고 발은 언어를 해체하여 문자의 형태로 되돌리고, 이를 읊었다. 의미가 사라진 이 시는 오직 음성만 남았기에 ‘사운드 포엠(Sound poem)’이라 불렸다. 문학의 이성적 언어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시를 낭송하는 문학가는 더 이상 중절모와 다림질된 프록코트를 입지 않았다.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엉성하게 만든 성직자의 옷이 대신했다.

Figure 2 장 아르프(Hans Peter Wilhelm Arp(Jean Arp), 1886~1966), 무제(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 콜라주)(Untitled(Collage with Squares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 of Chance)), 1916-1917, 찢은 종이에 색종이, 48.5x34.6cm, MoMA, 뉴욕, 미국. © 2023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장 아르프는 종이 위에 색종이를 찢어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풀로 고정했다. 회화에서 의도를 제거하려 한 그의 시도는 ‘우연’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성이 제거된 자리에는 원초적 진실과 무의식이 남았다. 다다이스트들은 이러한 이유로 쿠르트 슈비터스를 거부했다. 그의 작품에는 동전과 담배꽁초, 얼굴의 측면이 등장했는데, 이는 사회적 연결을 구성하여 해석의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슈비터스는 이에 ‘메르츠’라는 이름을 붙이며 응수했다.

Figure 3 쿠르트 슈비터스(Kurt Hermann Eduard Karl Julius Schwitters, 1887-1948), 메르츠 그림 32A. 더 체리 픽쳐(Merzbild 32 A. Das Kirschbild), 1921, 혼합재료, 91.8x70.5cm, MoMA, 뉴욕, 미국. © 2025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나는 다다이즘 미술을, 그 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형태를 메르츠와 비교했다. 그 결과 이렇게 결론지었다. 다다이즘은 오직 기존 질서에 맞서는 부정의 시도이지만, 메르츠는 그 부정적 요소들을 예술 안에서 일상의 재료들과 조화시키며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순수한 메르츠는 곧 순수한 예술이지만, 순수한 다다이즘은 예술이 아니라 비(非)예술이다." - Kurt Schwitters, Banalität, 1923 (in Kurt Schwotters, Das literarisches Werk, 1973-1981, Bd.5), p.148.
메르츠란 무엇인가. 그저 은행의 광고지의 단어였던 “Kommerzbank”를 해체하여 만든 의미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지만, 상류계층의 자본을 상징하는 은행의 단어를 파괴하고, 기존의 언어체계를 파괴하고 남은 파편이기에 그 자체로 다다의 저항의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상에서 찾아낸 파괴를 통해 새로운 가치의 씨앗이 된 것이다. 동전, 광고지, 버려진 조각, 티켓 같은 일상적 파편들은 그의 손에서 새로운 조합으로 재탄생했다. 그의 작업이 대중을 향한 까닭은 는 그 재료가 대중의 삶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들의 예술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지적인’ 언어로 소통되던 것과 달리, 메르츠는 삶의 잔해를 예술로 삼았다. 예술이 사회적 계급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이 때문에, 메르츠는 벽에 걸린 회화로 머물지 않고 부조, 입체, 공간으로 확장되어 마침내 ‘메르츠바우’라는 건축적 형태로 발전했다. 1919년 하노버 집 2층에서 시작된 작업은 1937년까지 이어졌고, 내부 전체가 메르츠 조각들로 가득 찼다. 폐기물로 채워진 공간은 근대 사회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비판적 제스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움직임은 베를린에서도 불붙듯 확산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붕괴는 사회 전체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갑작스레 등장했지만, 그것은 오래된 제국적 권위와 새롭게 도입된 민주주의가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서 있는 불안한 구조물 같았다. 정치적 혼란, 극심한 인플레이션, 퇴역 군인들의 상실감, 실업자들의 줄어든 호흡 사이로 독일 사회는 매 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부르주아지의 낙관을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제국의 권위는 무너졌으며, 종교는 삶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이성이 더 이상 세계를 지탱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일상 감정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 틈으로 새로운 감각의 예술이 밀려들었다. 바이마르 시기의 도시, 특히 베를린은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기묘한 활력을 품은 공간이었다. 밤거리에서는 새로운 유흥 문화가 쏟아져 나왔고, 거리에는 군복을 벗지 못한 남성들과 생계를 위해 밤을 나서는 여성들이 공존했다. 소비문화가 급속히 팽창해 ‘삶’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가벼워졌고, 동시에 목적을 잃은 인간들은 이 새로운 가벼움과 불안의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취리히의 다다가 모든 가치의 무의미를 외쳤다면, 베를린 다다는 그 무의미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했는지를 폭로하는 예술이었다. 그리고 이 폭로의 언어는 미적으로 정교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날 것, 찢긴 조각, 과격한 구도, 충돌하는 텍스트의 덩어리와 같은 것들은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스스로의 폐허를 통과하며 내뱉은 단말마과 같았다. 베를린 다다의 중심 인물들은 전쟁의 상처와 패전국의 혼란을 피부로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다다는 이미 아카데미를 조롱하거나 언어를 해체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부르주아지의 이성, 정부의 무능, 자본가들의 위선, 남성적 영웅주의의 허상까지 독일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정치적-문화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그 공격의 중심에는 라울 하우스만이 있었다.

Figure 4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 예술 평론가(Der Kunstkritiker), 1919-1920, 종이에 석판화, 31.8x25.4cm, 테이트 미술관, 런던, 영국. ©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23.
그는 자신이 자란 제국 독일의 도덕적 권위가 어떻게 전쟁과 살육을 정당화했는지 똑똑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조형 실험이 아니라, 시각적 언어로 사회를 해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라울 하우스만은 기존의 회화가 가진 시각적 통일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했다. 신문 조각, 전단지, 상업 광고, 선전 포스터와 타이포그래피(하우스만에 의해 작품에서는 음성 시의 형태로 조합되었다.) 등을 모아 구성한 모든 조각들은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움직이고 있던 기계와 같은 관료적 질서를 그대로 가져온 파편이었다. 하우스만이 사용한 방식은 바로 포토몽타주(Photomontage)였다. 포토몽타주는 단순한 사진의 합성이 아니라, 사진 조각들의 집합체이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잘려온 이미지들이 새로운 구조 위에서 결합되거나 충돌하는 장치였다. 하우스만이 끌어온 사진들은 개인적 기억이나 예술적 재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신문, 광고지, 전단, 선전 포스터와 같이 대중매체가 퍼뜨리는 이미지들의 파편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매일매일 생산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대적 시각성’이 어떻게 조작되고, 권력이 이미지로 자신을 정당화하는지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포토몽타주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당시 베를린 사회를 지배한 프로파간다의 언어를 다시 해체해 반격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대표적 포토몽타주 작업 〈예술평론가〉(1919-1920)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게오르게 그로츠의 얼굴이다. 그는 친구의 얼굴을 빌려왔지만, 실제로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자본의 힘에 무릎 꿇은 예술 비평가, 펜이 무기가 되어야 할 사람이 권력과 광고, 자본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었다.
하우스만은 비평가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인 눈과 입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비평이 더 이상 ‘본다’는 행위에 기반하지 않고, ‘말한다’는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비평가의 머리에는 광고지에서 잘라낸 구두가 붙어 있다. 경추에는 지폐 한 장이 꽂혀 있다. 비평가를 움직이는 것은 자본과 광고,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포토몽타주를 통해, 권력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를 다시 찢어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 내는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베를린 다다는 정치적 풍자, 선전의 재전유(re-appropriation), 사회 폭로라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베를린 다다의 이러한 정치적 힘은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태어날 때의 이름 헬무트 헤르츠펠데(Helmut Herzfelde) 를 버렸다. 독일 군국주의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독일식 이름을 폐기하고, 영미식 발음의 ‘John Heartfield’를 스스로 선택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이미지’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준다. 독일 공산당(KPD)의 창립 멤버였던 그는 파시즘과 나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Figure 5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1891-1968), 경찰국장 죄르기벨과 자화상(Self-Portrait with the Police Commissioner Zörgiebel), 1929, 포토몽타주, Academy of Arts of Berlin, Berlin, Germany. © The Heartfield Community of Heirs / VG Bild-Kunst, Bonn 2020 Akademie der Künste, Berlin.
그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는 사진을 무기로서의 사진(Photography as a weapon) 이라고 불렀고, 베를린 거리에서 유통되던 모든 시각적 프로파간다를 다시 잘라, 찢고, 재조립해 정권에 맞서 돌려주었다. 1929년 경찰국장 칼 죄르기벨(Karl Zörgiebel) 을 풍자한 포토몽타주는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프로파간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죄르기벨은 1929년 5월 1일, 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합법적 노동절 시위를 잔혹한 진압 명령을 내린 인물이었다. 그 사건은 “피의 오월(Blutmai)” 로 기록되었고, 공산당원들과 시민 수십 명이 거리에서 쓰러졌다. 이 사건에 대한 그의 분노는 곧바로 죄르기벨의 목을 가위로 잘라내는 그의 자화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갤러리가 아닌, 노동자들을 위한 사진 화보 신문 AIZ(Arbeiter Illustrierte Zeitung) 반체제 잡지에 실렸다. .하트필드가 잘라낸 것은 죄르기벨 만을 향한 단순한 분노 표현이 아니었다. 권력의 이미지를 해체하는 시각적 반격이라 볼 수 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찢긴 이미지들이 서로를 베어내며 새로운 정치적 초상을 만들어내던 이 시기, 다다는 더 이상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해체하는 하나의 시각적 도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다의 움직임은 파리에서는 실험적 감각으로 뉴욕의 급진적 태도로 전개되었다. 또 다른 형태의 반-예술이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음 장에서는, 베를린의 폐허를 벗어나 파리와 뉴욕이 만들어낸 또 다른 다다의 이미지들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