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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ND FASHION: PRINCE OF COUTURE, JACQUES DOUCET



글. 홍성연

예술과 패션: 쿠띄르의 왕자 자크두세(Jacques Doucet)

     

    

   



  

자크 두세(jacques doucet)는 1853년 2월 19일에 태어난 초기 파리의 패션에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동명이인인 화가 자크 두세는 1924년 4월 9일에 태어난 프랑스의 서정적 추상화 화가로 다른인물입니다. 자크 두세가 종종 오띄꾸띄르 창시자인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와 비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귀족스타일의 워스와 다르게 자크 두세는 레이스를 이용하여 여성성, 연약함, 유동적인 스타일을 디자인했습니다. 그의 조수로는 폴 푸아레(Paul Poiret)와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가 있습니다.

     

두세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영향으로 패션 사업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는 남성셔츠 사업을 하고 있는 아버지 에드워드 두세(Édouard Doucet)와 레이스와 여성용 란제리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 마틸드 두세(Mathilde Doucet,)의 밑에서 태어납니다. 왼편엔 아버지 에드워드의 가게, 오른편엔 어머니 마틸드의 가게가 나란히 존재했으나, 1869년. 에드워드가 두 가게를 합병하고 왼쪽의 가게를 처분하여 오른쪽 가게(어머니의 가게)만 남게 됩니다. 1875년에 학업을 마친 두세는 대담하게 패션하우스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나, 당시 아버지는 이런 결정에 매우 실망했다고 합니다. 자크 두세는 가업인 고급란제리와 레이스를 유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밍크자켓을 선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인 자크 두세의 천재성을 이해했고, 그들은 성공한 상인이 됩니다.

 

두세는 레이스와 주름. 자수의 조합을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여성의 몸주변에 파스텔 색조의 쉬폰 소재와 얇은 실크 그물, 세틴과 레이스를 이용하여 은은한 겹침을 만들어내 당시의 상징주의 회화와 시가 불러일으킨, 투명한 여성성의 이상을 잘 표현했습니다. 또한, 큰 퐁파두르 장미 등의 로코코 식물레퍼토리와 백합, 난초 등의 아르누보 식물레퍼토리 등, 꽃 프린트들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두세 드레스의 실루엣과 기본 디자인은 시대와 함께 진화했지만 레이어드 된 얇은 소재, 메탈릭 트림 및 파스텔 색상의 사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크두세의 가게 LA MAISON JACQUES DOUCET(1908)/ 두세가게 앞의 점원들(1910) / 구름과 벌을 모티브로 수를 놓은 변형 로브(1900-1905)/ 허리 리본에 골드 프린트 라벨이 들어간 드레스(1900년경) / 1912년 Doucet 판매 카탈로그 표지(1912)/

     



그의 주요 고객들은 세계적인 여배우들과 댄서들 (Sarah Bernhardt , Liane de Pougy , la Belle Otéro, Cléo de Mérode 등)과, 엘리자베스 드 리케 드 카라만-쉬메(la comtesse Greffulhe,)백작부인 드의 부자 여성들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여배우 가브리엘 레잔(Gabrielle Reju aka Rejane)은 마을과 무대 모두에서 그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베르통과 시몽의 희곡인 Zaza(1898)의 역할에서 역시 그의 옷을 입었는데, 당시 재단사 부서의 폴 푸아레(Paul Poiret)가 무대의 의상담당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푸아레는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게 됩니다. 이렇듯 두세의 하우스는 당시 패션에서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패션 하우스는 전쟁 이후 점점 쇠퇴하여 결국 1937년 이후 문을 닫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동안 많은 디자인을 유행시켰고, 당시의 Vogue나 GAZETTE DU BON TON 잡지를 통해 많은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의 작품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남기게 됩니다. 특히 당시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H.로버트 더미(H. Robert Dammy)등이 그의 작품을 아름다움 일러스트로 남기게됩니다.

     

            

            


윗줄왼쪽부터>두세의 컬렉션과 모델들(1911-1914) / 가브리엘 레잔의 Zaza의상

아랫줄왼쪽부터>H. Robert Dammy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GAZETTE DU BON TON (1913, 1914,), 작가미상의 일러스트, 보그 1924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뿐만 아니라, 후대에 지속적으로 Jacques Doucet의 영향이 미치는 이유는 그의 수집가이자 후원가로서의 열정 때문입니다. 1874년, 그의 나이 21세부터 인상파 화가들에게 그림을 구매하기 시작했고 1896년과 1912년 사이에 열정적으로 18세기 프랑스의 가구와 예술 작품 컬렉션을 모았습니다. 그는 타고난 호기심과 분별력 있는 감각으로 작품을 모았고 점차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1907년, 그는 컬렉션을 소장하기 위해 Spontini거리에 개인 맨션을 지어 문을 열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객이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풍부한 미술사 도서관의 핵심이 될 수백 권의 책과 카탈로그를 축적했습니다. 후에 이 자료들은 1929년 6월 1일 그의 유언에 의해 파리 대학에 기증되었습니다. 두세의 이름이 들어간 Bibliothèque Littéraire Jacques Doucet 문학 도서관은 보들레르에서 현재까지 문학 아카이브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컬렉션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두세의 컬렉션의 가장 큰 변화는 1912년에 일어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궁정풍의 예술품에 지친 그가(비공식적으로 비밀연인을 잃은 그가), 자신의 전체 컬렉션을 판매했습니다. 작품 중에는 Watteau, Fragonard 및 Hubert Robert의 드로잉, Quentin de La Tour 및 Perronneau의 파스텔화등 유명화들이 다수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 공개 경매로 벌어드린 13,884,460프랑은 그 당시 가장 비싼 판매가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경매를 위해 전문가와 미술사가 및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특별 작성한 과학적 차원의 사진을 포함하여, 문서화 된 판매 카탈로그를 작성했다 점에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후 현대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두세는 마네,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두아니에 루소 등을 모았으며, 1924년엔 혹평을 받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Demoiselles d'Avignon)을 호평하며 구매한 첫 번째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자신의 집에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은 행보를 보면, 그와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그와 친분을 다졌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작품을 남겼습니다. 가장 많이 이용되는 두세의 캐리커처는 프랑스로 귀화한 이탈리아 화가 레오네토 카피엘로(Leonetto Cappiello)가 1903년에 그린 작품들입니다. 피에르 가티에(Pierre Gatier)또한 두세와 관련된 그림을 다수 남깁니다. 1910년 11월 15일 Galerie Georges Petit에서 Salon of Original Color Engraving 이 열린 직후, 가티에의 일기에 두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 첫 번째 만남은, 곧 두세의 다양한 활동장소인 rue Spontini(그의 컬렉션)와 rue de la Paix(패션 하우스), avenue du Bois(개인 맨션)에서 점심식사나 회의로 이어졌습니다. 20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통 관심사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티에는 패션하우스 앞의 거리, 패션하우스의 풍경, 자크 두세등을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윗줄왼쪽부터>화가 피카비아와 두세 / 레오네토 카피엘로가 그린 자크두셈 / 피에르 가티에가 자크 두세에게 보낸 편지, 펜과 연필, 1912년.

아랫줄왼쪽부터>피에르 가르티에, Chez le Couturier, 1911./ 피에르 가티에(Pierre Gatier), 쉐 르 쿠튀리에(Chez le Couturier) 수체화버전, 1911년.

     

     

텐레 헨리(Henry Tenré)는 rue Spontini에 있는 자크두세의 작은살롱인 프라고나드 Fragonard)와 큰살롱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를 통해 1910년경 두세의 살롱 레이아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왼쪽아래의 <책을 들고 있는 아이의 초상(1744)>은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안드레안 카르보우스키(Adrien Karbowsky, 1855-1945)는 두세의 넓은 거실의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왼쪽 하단의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보라색 벨벳 코트를 입은 Abraham van Robais의 초상 (1769) 입니다. 안드레안은 스폰티거리의 있는 두세의 저택을 31개의 드로잉으로도 남겼습니다.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역시 1920년대의 두세의 아파트에 전시되어있는 컬랙션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곳에 있던 컬렉션들은 2015년에 대중앞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전시제목은 “자크두세와 입생로랑:아트를 위한 삶(Yves Saint Laurent-Jacques Doucet: VIVRE POUR L'ART)”입니다. 예술을 사랑한 두 패션디자이너의 집을 복원한 전시로 두세의 가 사망하기 5년전에 33 rue Saint-James가에 있는 소유한 맨션에 거주지겸 갤러리로 사용하였던 곳입니다.

               

     


위쪽 왼쪽부터>텐레헨리, 자크두세의 작은 살롱 « Fragonard », 1911 / 텐레 헨리, 자크두세의 호텔의 큰 살롱, rue Spontini, watercolour, 1910년경 /  안드레안 카르보우스키, 자크 두세의 개인 저택, rue Spontini , 1904년경,

아래쪽 왼쪽부터>아일린 그레이가, 생제임 거리에 있는 자크 두세의 "스튜디오", 1929년경/ 자크두세와 입생로랑:아트를 위한 삶 전시전경 2015

 


     

두세가 남긴 작품들을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는 건축가들을 지원했으며 다량의 예술가구들을 수집하였습니다. 또한 두세가 수집한 일부 작품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아비뇽에 있는 Musée Angladon - Collection Jacques Doucet미술관에 기증되었습니다. 두세는 역사적으로 성공한 패션디자이너지만, 그의 삶에서 보이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컬렉션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과 미술관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는데 도움을 받고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보그의 별칭처럼 진정한 예술과 꾸뛰르의 왕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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